In the polar regions
추운 곳으로 가요.
북쪽으로, 가장 높은 곳으로.
가장 늦게 죽을 수 있는 곳으로.
11034 2026년 9월 23일 14,619자
인간이 결국 세계를 멸망시켰다.
사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하지만 세계는 멸망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고 있으며 회복 가능한 임계점을 넘어선 지도 오래였다. 종말은 피할 수 없는 결과로 고정되었다. 어떤 변수를 가져와도 돌이킬 수 없다. 이미 다 망해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모습이 아직 아니라고 해서 그게 멸망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므로, 세계는 멸망했다.
원인은 태양 때문이었다. 물론 태양을 그렇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가 있긴 했다. 인류의 폭발적인 번식력, 통제되지 않는 욕심, 빈익빈 부익부, 기후 위기, 자연 소멸하지 않고 계속해서 순환하는 영혼의 특성, 그런 것들. 본디 인류의 터전이던 지상은 물론이요, 죽은 인간의 영혼을 수용하던 지하까지 과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인간의 영혼은 끝없이 불어났고 그들의 탐욕은 더더욱 끝이 없었다. 그 결과로, 지상의 하늘에는 구멍이 뚫렸다. 태양이 독과 같은 열기를 가없이 뿌려댔다. 이것은 단순한 오존과 자외선에 대한 비유가 아니다. 태양은 오래된 마법의 응축체였고 생명력의 발원인 동시에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무력(武⼒)이므로. 그런고로, 태양에 의해 세계는 종말에 이른다.
징조는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사신번호 5012도 자신의 일터에서 그 조짐을 눈치챘다. 사자(使者)들이 여기저기서 과로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영혼이 늘어나는 속도를 저승사자가 따라가지 못했다. 훈련소를 확장하고 신규 인력을 투입해도 그랬다. 과중한 업무로 영혼병에 걸려 죽은 저승사자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안 그래도 빠듯하게 돌아가던 시스템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세상이 망하려는 게 아니냐고. 이전에도 막연하게 위기감을 느끼던 이들은 있었으나 이제는 모두가 현실감을 가지고 구체화되는 종말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섬뜩함이 내려앉았다. 그런 와중에도 일상은 돌아가야만 했다.
5012가 그런 기류를 감지하고 있을 때, 0429는 무척이나 바빴다. 평범한 저승사자로서 업무도 막중했지만 가욋일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조직의 윗선과 끊임없이 연락하는가 하면, 오랜 경력과 0429만의 특수한 지위로 인해 접근할 수 있는 조직 내의 다양한 사조직과도 활발히 교류가 있었다. 0429가 접촉을 시도하는 것인지 그들이 0429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5012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공기가 불온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0429가 정확히 뭘 하며 돌아다니는지 5012는 몰랐다. 영혼 공명으로 인해 그녀의 생각, 감정, 감각이 간헐적으로 흘러 들어오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꿰어맞추기에는 힌트가 너무 부족했다. 0429는 5012에게 자신의 은밀한 활동에 대해 공유하지 않았고, 5012는 0429의 은밀한 활동을 굳이 캐내려 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필요한 순간 필요한 만큼 알려줄 것이라 믿었다.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임무는 전부 끝마치는 그녀였지만 결국에는 0429도 몸은 하나뿐이다. 워커홀릭인 5012는 0429가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느라 남겨진 시간에 혼자서 추가 업무를 진행했다. 고양이 손 하나가 절실한 시기였다. 너나없이 잔업에 시달리고 있는 때에 나 몰라라 하는 것은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가장 완벽한 저승사자의 수제자이자 페어, 그 자신도 이미 충분한 경력을 가진 5012는 혼자서도 다른 이보다 훨씬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만큼 해낸다. 유능한 일꾼에게 일이 쏟아졌다. 5012는 이제 0429와 짝을 이뤄 처리하는 일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잔업을 혼자 감당했다. 너무나도 바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바빴다. 휴식할 틈이 없었다. 정신이 온통 쏟아지는 영혼을 수거하고 처리하는 과정에 쏠려 있었다. 몸속 빛과 어둠의 균형이 다시 위태롭게 흔들린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것을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얘, 이브.”
5012가 불려 간 것은 그즈음이었다. 앞자리 번호를 따서 파이브, 다시 줄여 이브. 5012는 0429의 조그마한 키에 눈높이를 맞추며 대답했다.
“예, 선배.”
제 명치께에나 올까 말까 한 자그마한 키와 또 그만큼 왜소한 몸집, 나른한 눈매와 어디서나 가볍고 우아한 행동거지. 외견만 보아서는 검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산뜻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정체는 사실 명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자를 처단하는 무자비한 심판자. 폭력과 죽음으로 덧그려진 가장 완벽한 그림자라 불리는 자. 5012는 다시금 그녀의 정체를 상기했다.
“내가 요새 바빠서 네게 소홀하긴 했다만.”
0429가 느른하게 뜬 눈을 들어 올렸다. 5012는 그 서늘한 눈빛이 오랜만에 두렵게 느껴졌다.
“요새 네 몸의 어둠이 많이 흔들리는 게 보이는구나.”
이미 한 번 깨어진 전적이 있던 영혼의 그릇은 불균형에 취약하다. 그동안은 0429가 곁에 붙어서 세심하게 케어해왔지만 한동안은 그러지 못했다. 누적된 빛이 그의 육신을 흔들고 있다는 것을 0429가 눈치챈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 싶어, 할 말이 없는 5012는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 시선만 피했다.
“너나없이 바쁜 걸 아시잖습니까.”
“그렇다고 몸까지 해치며 일을 하니?”
“잘못했습니다.”
순순히 납작 엎드리는 5012의 모습에 0429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는 듯 혀를 찼다.
“알면 한동안 일은 좀 쉬엄쉬엄하렴.”
“그게 되겠습니까?”
5012가 우려를 표했다. 말 그대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모두가 바쁜 때였다. 사유 없는 휴가 신청도 전부 반려되고 있는 와중이었다.
“아니. 건강 핑계를 대서라도 쉬어야 해.”
“예?”
“분위기가 심상치 않구나.”
그 말이야말로 심상치 않게 들렸다. 5012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제로. 무슨 일입니까?”
0429, 제로. 그녀가 한동안 업무 외 일로 바빴던 것을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었다. 내부 감찰과 즉결 처분이 가능한 그녀는 일개 저승사자의 몸으로도 조직의 가장 은밀한 장소까지 접근할 권한이 있었다. 최근의 행보를 함께 돌이켜보면 0429는 5012가 알 수 없는 어떤 정보를 접한 것이 틀림없었다.
“몸을 사려야 하는 일이 생긴 겁니까?”
“생길 거란다.”
“그렇습니까…….”
정확한 사정은 함구하였지만, 5012는 0429의 판단을 믿었다. 하지만 그녀의 뜻에 따르려고 해도 여전히 어려움은 남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활발하게 업무를 보던 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이탈하면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주변의 시선도 문제가 있고요. 건강 핑계를 대어도 당장 업무를 중단하고 휴가를 받을 수는 없을 겁니다.”
5012가 그런 사정을 밝히자 0429는 납득했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야무지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내가 도와주마.”
“잠시만, 선배. 혹시…….”
“쉴 수밖에 없게 만들어주지.”
0429는 아공간에 담아 온 명계의 짙은 어둠을 주먹에 두른 채 5012를 흠씬 두들겨 팼다. 혼의 균형이 간신히 유지 될 정도로만, 적절히 조절한 덕분에 그들은 바쁜 와중에도 나란히 팔자 좋게 병상에 누울 수 있었다.
“선배도 같이 앓아누울 게 뻔한데도 그러셔야 했습니까…?”
“덕분에 나도 겸사겸사 쉴 수 있게 되었잖니.”
육신의 상흔까지 공유하는 운명공동체인 그들은 한쪽이 다치면 다른 한쪽도 같은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0429는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과일을 까먹었다. 5012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녀가 권하는 귤 한 조각을 기어코 받아먹지 않고 버텼다. 다행히 0429도 아픈 몸이라 먹지 않고 버티는 5012를 힘으로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그렇게 짧은 휴식이 주어졌다. 비보가 전해진 것은 그 둘이 드러누운 지 사흘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지며 혼란을 빚었다. 종과 개념의 분류를 가리지 않고 존재하는 이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다. 정보를 통제하는 것에 실패한 상위의 존재들은 후폭풍만이라도 줄이려 했다. 가능할 리 없었다. 세계가 머지않은 미래에 확실하게 망한다는 근거 있고도 자세한 예언은 어떻게든 숨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지상의 점성술사들이 절망했고 세계와 우주의 진리에 통달한 신적 존재들이 침묵으로 확신을 더 했다. 멸망의 묵시록은 추상적이지도 몽롱하지도 않았으며 똑바르게 구체적인 사실만을 묘사했다. 우리는 모두 8월에 죽을 것이다. 갈증과 더위 속에서 말 그대로 열사와 일사에 시달리며 죽을 것이다. 밤은 더 이상 휴식이 되지 못하리라. 태양이 달구고 간 지표는 스물네 시간을 내리 후텁지근할 것이다. 육신에 얽매인 것들부터 죽어가리라. 그들의 삶과 죽음이 포화하면, 남은 초월자들마저 멸하리라. 태양이 일으킨 열병은 세상을 모두 죽일 때까지 멎지 않으리라.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으리라. 누구도 라는 말은 공평하게 모두를 뜻하므로, 너 역시도 피할 수 없으리라.
“선배는 알고 있었죠?”
5012는 직감했다. 생각과 감각이 무작위로 공유되는 상황에서 제 동반자에게까지 비밀을 지키기 위해 0429가 얼마나 섬세하게 자기 자신을 통제했을지 차마 가늠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통제하고 은닉하려고 했습니까?”
“그게 ʻ윗선’에서 요구하는 바였단다.”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판단은 무의미해. 나는 명령을 받았고, 그러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제 다 틀렸지만.”
이제 다 틀렸다. 5012도 0429도 알았다. 이 한가로운 의무실까지 소식이 당도하는 동안 벌써 조직 곳곳에서 소요가 있었다. 비단 그들이 속한 조직뿐만 아니라 저 바깥도 이미 시끄럽게 요동치고 있을 터. 혼란은 더욱 빠르고 거세게 번질 것이다.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을 방지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ʻ상위 존재’들이 택한 방법은 은닉이었지만, 그 전략은 생각보다도 이르게 실패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전부 소멸하는 것뿐입니까?”
“그래.”
“아무도 피할 수 없고요?”
“그래.”
“바꿀 수도 없는 거고요?”
“그래.”
5012는 머리를 짚었다. 매일이 생을 향한 투쟁이었다. 그저 계속 살아가기 위해 삶을 지속했고, 끝없이 영속되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삶을 살았다. 한없이 언제까지고 그럴 것처럼 굴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그 모든 것이 끝난다고? 지키는 것이 무용하다고? 미묘하게 찌푸려지는 0429의 표정을 통해 그녀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5012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선배는요?”
“뭐가 말이니.”
“이제 다 죽는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질문과 동시에 강렬한 통증이 있었다. 5012는 표정을 차분히 두는 것에 실패했다. 뒤섞인 영혼을 통로로 하여 흘러 들어오는 감정의 폭포는 지금껏 그녀가 이것을 어떻게 숨겨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대한 고통이었다. 괜찮지 않은 것이다. 그녀 역시 이 종말이 전혀, 괜찮지 않았다.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0429가 대답했다.
“죽고 싶지 않아.”
언제나 그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타 위풍당당하게 굴던 그녀에게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사라지고 싶지 않아…….”
꺼질 듯한 중얼거림. 그 어색한 간지러움을 5012는 견딜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몹시 크게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것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꼼짝없이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만다. 그러고 나서야 5012는 0429의 낯을 확인할 수 있었다. 씁쓸함이 감돌았다. 가끔, 그녀가 무척이나 어린애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제 앞에서만 보여주는 그런 모습들에 이유 모를 만족감도 들었다. 아랫배가 흡족하게 부른 기분으로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인 그녀를 아이처럼 취급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녀는 사신번호 0429, 질서의 수호자, 인간의 기억과 자아라는 흠결 많은 실패작의 한계를 뛰어넘어 가장 우수하고 유능한 사신이라는 것. 아무리 때때로 애처럼 군다지만, 5012는 그녀를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되며 또한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높은 존재다. 5012는 문득 그것을 실감했다. 따라잡고자 그렇게나 노력했어도 아직 자신은…….
“선배는 이미 받아들인 겁니까?”
0429는 표정에 아무 변화도 없었다. 아직도 심장께에 어릿하게 남은 고통과, 거품 같던 한탄이 귓가에 맴도는데도. 평소의 맹한 낯으로, 조소에 가깝도록 입꼬리를 당기고 그녀는 대꾸했다.
“나는 너보다 훨씬 이전에 그 사실을 접했단다.”
“…….”
“화내고, 절망하고, 곱씹고, 부정하고, 끝내 수용하기까지 이미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
“수용했다고요.”
“방도가 더 있니?”
0429가 못 박았다.
“이건 그 어떤 신적인 존재도 피할 수 없는 종말이야. 우리 역시 예외는 없다. 그런 재앙이야.”
“왜 저를 이딴 곳에 처박아 놓은 겁니까?”
5012는 화를 냈다. 아니다. 사실은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목소리가 커졌다. 마치 그녀에게 화가 났다는 듯, 화를 내야만 한다는 듯. 아니야, 별로 화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어차피 전부 죽을 텐데, 건강 핑계를 대서라도 몸을 사리라고요? 몸을 해치지 말라고요? 그게 다 의미가 있습니까?”
0429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진정하렴.”
울컥. 5012는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기이했다. 이런 반응은 분명 비정상적이다. 제가 조금이라도 성질을 부리면 바로 응징하는 그녀가 아니었나.
“네가 위험에 처하면 나도 같이 위험해져. 어차피 다 죽을 거니까, 뭐 그렇게 생각하면서 명을 재촉하는 짓이라도 할 거니? 어리석게 굴지 마.”
그 말이 맞았다. 5012는 정신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5012와 0429는 운명공동체. 영혼이 뒤섞여 삶과 죽음을 공유하는 자들. 어느 한쪽이 죽을 때 다른 쪽도 같이 스러지는 것이었다. 5012는 침음을 삼켰다. 갑자기 그 사실이 매우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뭐가 싫은데?”
5012의 생각을 읽고 0429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그러겠다는 거야? 어차피 죽을 거 당장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상관없다고? 얘, 5012…….”
그녀의 말을 끊고 5012는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도망쳐요.”
0429가 눈꺼풀을 반만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5012가 다시 말했다.
“도망쳐요.”
“어디로?”
“어디로든.”
0429의 표정이 구겨졌다.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억지떼를 쓰는 아이를 보는 심정으로 내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거니. 갈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어.”
“…북쪽으로.”
5012가 간신히 대답했다.
“추운 곳으로 가요. 북쪽으로, 가장 높은 곳으로. 이 땅에서 가장 늦게 죽을 수 있는 곳으로.”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멸망은 겨우 그런 것으로 미루거나 늦출 수 없었다. 0429는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했다.
“바보 같은 소릴 하는구나.”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고, 현실은 엄혹하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고 차분히 5012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르침을 주었다.
“추운 땅을 찾는다면 북극보단 남극으로 가는 게 나을 거다.”
…? 5012가 웅크린 고개를 들었다. 0429는 그의 눈을 피했다. 이건 그냥,
“나도 죽기 싫은 건 마찬가지니까…….”
5012의 거대한 덩치가 답지 않게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도피행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조직의 가장 충직한 번견 노릇을 하던 0429나 일 중독자에 가깝게 임무를 맡던 5012나, 조직에 깊은 소속감 같은 걸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은 서로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바로 다음 날, 0429와 5012는 지하 세계를 벗어나 지상으로 도망쳤다. 휴식을 위해 핑계 삼았던 혼의 불균형이야 어차피 태양이 요동치는 지상 위에서는 금방 회복될 상흔이었다. 지체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망자의 영혼을 수거한다는 임무를 띠지 않은 채로 지상에 올라오는 일은 드문 경험이라, 0429와 5012는 잠시 넋을 놓고 길 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일을 하지 않는 상태, 할 일이 없는 상태라는 건 둘 모두에게 낯선 것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5012가 먼저 입을 열었다.
“추적은 없겠죠?”
“그럴 여력도 없을 거다.”
0429가 성마른 웃음을 토해냈다.
“0429가 아닌 차명으로 다른 사신들을 선동해 뒀거든. 조직을 배신하고 임무를 내던지고 자리에서 이탈하라고. 지금쯤 저 아래는 난장판일걸. 배신자도 한둘일 때나 보복할 수 있는 거지, 이렇게 단체로 나오면 수습하기 쉽지 않지. 안 그래도 인력난이었잖니. 남은 사자들을 어르고 달래서 그나마 남은 질서라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일 텐데, 지금의 조직에는 그럴 유인이 없어.”
시선이 먼 곳에 닿았다.
“조직은 순조롭게 붕괴할 거다. 이 세상이 무너지는 속도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몸담았던 둥지를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자의 마음은 비열한가. 혹은 냉정한가. 5012는 흘러 들어와 제 가슴에 공명하는 이 마음을 가만히 헤집어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쓰디쓴 애정이었다. 5012는 0429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 남들은 그녀를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성정으로 알았지만, 5012는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았다. 남들은 그녀를 조직에 충성하며 규율과 위계에 깍듯이 복종하는 이로 알았지만, 5012는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5012는 0429도 그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희미하게나마 사랑할 줄 안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럼 갈까?”
“예.”
목적지는 저 극점이다. 남극이 어쩌고 북극이 저쩌고 하다가도 0429는 결국 북극행을 받아들였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어쩌고저쩌고 협약 때문에 남극에는 민간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그 얼음 대륙에 건너가기 위해서는 항공기나 배편이 필수인데, 저승사자의 업무에나 쓰일 용도로 적당히 위조해 놓은 보통 등급 신분증으로는 허가를 받을 도리가 없었다. 반면 북극은 그 권역에 여러 국가가 경계를 대놓고 있는 데다가 여행 패키지도 있을 정도로 출입의 장벽이 낮았다.
애초부터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 때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통로는 권역별로 몇 군데로 정해져 있었고 그마저도 자신이 맡은 영역 외의 곳에 방문하려면 조직의 허가가 필요했다. 도망자가 쓸 방법은 아니었다. 지상에서 직접 이동하는 수밖에.
“다행히 스톡홀름까지 가는 비행기가 아직 운행하는군요. 이후부터는 육로와 해상을 이용해야 합니다.”
지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반쯤 망했다고 봐도 좋았다. 종말에 대한 예언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지상이 곧 망할 것이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존재가 예견하고 있었다. 인간 사회의 많은 기능들이 마비되었고, 사회적 울타리로서 그 의의를 잃어버린 국가도 여럿이었다. 여객기가 아직 뜨는 게 신기했다.
푯값이 말도 안 되게 비쌌지만, 둘에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구름 위를 날아가며 5012는 생각했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던 이카로스. 그러다 밀랍 날개가 녹아 추락한 이카로스. 어리석고 어리석은 이카로스. 바보 같은 꿈을 꾸던 이카로스…….
스톡홀름에서는 오슬로까지 국경을 넘는 기차를 탔다.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엔 밖에 나가 연어 그라브락스와 카넬불레를 사 먹었다. 처음 보는 음식이라면 꼭 입에 넣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0429의 고집 때문이었다. 궁금한 건 많으면서 입은 짧은 그녀는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금방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머지를 해치우는 건 5012의 몫이었다. 컵을 밀어 떨어뜨리기 전의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하고 삭힌 청어 요리를 시킬지 말지 고민하는 걸 말려서 다행이었다.
달리는 기차의 창밖으로 푸릇한 초원이 점차 차갑게 변해갔다. 장거리 여행에 심심해진 0429는 끊임없이 5012를 괴롭혔다. 잠든 0429의 발 받침이 되어서야 그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노르웨이에 도착해서는 북쪽으로 올라갈 일만 있었다. 빙하가 긁고 간 울퉁불퉁한 해안선을 따라 알레순트, 트론헤임, 나르비크를 거쳐 트롬쇠까지. 다리를 건너 들어가야 하는 그 섬 도시는 유럽의 최북단 대도시이자 북극 탐사의 출발지이기도 하여서 북극의 관문이라고도 불렸다. 북극권에 들자, 이 같은 여름에는 밤에도 하늘이 밝았다. 백야였다.
그들은 그곳에서도 더욱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갔다. 여정은 천천히 되었다. 대도시가 아니라면 대중교통이 거의 운행되지 않았다. 차량을 빌릴 수 있는지 알아볼까 하는 생각을 못 한 것은 아니었지만,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도 입 밖으로 그 아이디어를 내뱉지는 않았다. 캠핑용품을 적당히 둘러매고 둘은 그저 느긋하게 걸었다. 해가 길어서 오래 걸을 수 있었고 걷기 싫어지면 5012가 0429를 업고 다시 걸었다.
눈이 내렸다. 계절이 여름이면 뭐 어떻냐는 듯 뻔뻔하게도 폭설이었다. 날씨가 엉망진창이었다. 저명한 지리학자가 갈라놓은 기후 구분은 진즉 무너졌고, 고위도와 고산지대의 한랭한 지역에도 무차별적으로 열사병이 찾아오는 상황. 인간은 북위 70도에서도 익어 죽는데, 땅과 바다는 여전히 눈벌판에 얼음이었다. 지성체만을 골라 죽이는 명백히 기이한 광열. 5012는 고개를 들어 내리쬐는 태양을 올려다보다가 관뒀다. 망막에 잔상이 남아 하얀 설원에 푸른 멍이 들었다.
대륙의 끝에 도달하면, 아무렇게나 배를 구하자. 빌리든, 훔치든. 그래서 더 깊이 안쪽으로 들어가자.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를 경유했다가, 그 뒤로는 북극점까지도 가자. 가면서 하얀 북극곰도 보고, 바다코끼리와 고래도 보자. 0429는 끝없이 종알거렸다. 북극에 오자고 한 건 5012였는데, 정작 그는 그런 것들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끝없이 걷는 것에 질릴 때면, 텐트를 치고 하얀 눈 속에 모든 소리를 파묻은 채 0429를 껴안았다. 0429는 근래 들어 너무 밝히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그의 몸을 받아주었다. 엉켜있는 것에 온종일 몰두해 있느라 5km도 이동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상관없었다. 5012는 북극에 가는 것보다 그게 더 좋았다.
인적이라곤 보지 못하게 된 지 사흘째. 눈밭에 몸을 던지고 0429는 눈 천사를 만들었다. 너도 하자고 잡아당기는 손을 무시하면 또 얻어맞을 것 같아, 5012는 옆에 누워 얌전히 팔다리를 휘적였다. 0429의 것은 아주 작았고, 5012의 것은 아주 컸다. 검은 머리카락에 눈을 잔뜩 묻히고 0429는 비죽비죽 웃었다. 5012는 뭐가 웃긴 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머리가 어지럽기만 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다시 충동적으로 0429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한참 숨소리를 들었다.
하얗고 밝은 밤에도 점점 익숙해져 갔다. 저기 희미하게 빛나는 별이 보이느냐고 0429가 열심히 손가락질했으나 5012의 시선에는 잡히는 게 없었다. 0429는 너 참 지루한 사내라고 투덜거렸다. 5012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도 그는 지루하게 살아왔었다. 0429는 별이 보인다고 했지만 그의 눈에는 하얀 태양광만 들어왔다. 보고 있으면 구토감이 들었다. 저절로 지면만 보고 다니게 되었다. 앞서가는 0429의 작은 발만 쫓았다.
둘 다 훈련을 받은 몸이니 꾸준히 걷기만 한다면 며칠 내로 북단에 닿을 텐데도 여정이 늘어지고 있었다. 망해가는 세상의 한가로운 여행자란 이질적인 존재라, 인간과 마주치는 것을 최대한 피해 다니느라 경로가 뒤틀렸다는 걸 고려해도 그랬다. 발걸음을 늦추는 건 오히려 0429가 더욱 심했다. 5012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맞췄다. 햇빛이 강해서 차라리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볕이 거셌다. 아, 그래. 이건 마치 영혼이 생명의 빛에 과도하게 노출될 때나 느꼈던…….
“조금 쉴까.”
0429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5012도 따라 걸음을 멈췄다. 현기증이 돌았다. 수분을 섭취하지 않아도 충분한 몸인데도 자꾸만 목이 탔다. 침을 모아 삼키며 5012는 머리를 짚고 제자리에 가만히 섰다. 이게 다 태양 때문이었다. 저 빌어먹을 태양이 자꾸만, 그를.
“듣고 있니, 5012?”
“……아.”
“하루 정도 더 걸으면 바다가 보일 거다.”
“그렇습니까.”
대답은 고분고분했지만 신경은 다른 데에 가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0429는 예사 맹하고 태연한 낯으로 저 할 말만 했다.
“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내고 내일 다시 출발하자꾸나.”
“알겠습니다.”
흐트러지는 걸음걸이를 단정히 맞추려 애쓰며 5012는 텐트를 세웠다. 0429는 간이의자를 펼쳐놓고 놀기만 했다. 밤은 여전히 밝고, 하늘에선 태양이 지는 법이 없었으며, 온 사방은 눈과 양광으로 하얬다. 5012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오늘은 수면을 좀 취해야겠다고 말하며 텐트로 들어가 누웠다. 0429는 밖에서 뭘 하는지 따라 들어오질 않았다. 신경을 쓰지도 못하고 5012는 잠에 빠졌다.
그날, 5012는 고열과 환몽에 시달리며 심하게 앓았다.
“…….”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5012는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앓느라 기력이 빠져서가 아니라, 배와 가슴 위에 올라와 엎드려있는 0429 때문이었다. 무거운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기척을 냈다가는 깨어나서 신경질을 부릴 것 같았다. 5012는 숨쉬기가 한결 편해진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조용히 눈만 굴렸다.
“한번 깨진 영혼의 그릇은 취약하기 짝이 없단다.”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지만, 간신히 튀어 오르는 것만을 면했다.
찰싹 달라붙어 안겨있던 0429는 예상과 달리 자고 있지 않았다. 5012는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영혼병에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내몰렸다가 소생한 경우가 드무니 잘 모르겠지. 단순히 소금물에 소금 붓고, 물 붓고 하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게 아니란 말이지.”
0429가 말을 할 때마다 우물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5012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저 태양에 대해 더 유심히 생각해 봤어야 했는데.”
“태양이 왜요?”
“종말의 근원이잖니. 육신에 얽매인 것들부터 죽이고, 그 후에는 명계의 것들마저 죽이는.”
백야. 스물네 시간 해가 지지 않는 계절. 하늘에는 구멍이 뚫렸고 태양은 독과 같은 열기를 가없이 뿌렸다. 그 아래 노출된 금 간 영혼이 하나 있다.
“우리는 본디 생사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지만 저것의 앞에서는 전부 무의미한 희망이지. 그래도 유예는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너처럼 금가 취약해진 영혼은 필멸자만큼이나 저것 앞에서 약해지는구나.”
“제가 겪는 것이 영혼의 병이 맞았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이 잠깐의 평안은 0429가 그녀의 어둠 섞인 영혼을 나누어준 덕이리라. 5012는 행간을 읽으며 팔로 0429를 감쌌다. 그녀의 몸이 뜨거웠다. 더욱 깊게 뒤섞여 긴밀해진 감각의 공유가 그녀의 몸 상태를 거름 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신이 위태로워질 정도로 어둠을 나누어주면 어떡합니까…….”
“…….”
0429가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가슴팍에 뺨을 기대고 그녀는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죽는 건 싫지만 뺏기는 건 더욱 싫었단다.”
“뺏기다뇨.”
“차라리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 걸 빼앗기도록 두지는 않아.”
0429가 스르르 일어섰다. 5012의 몸 위에 양손을 짚고,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흘러내려 세상으로부터 그들을 가렸다. 5012는 0429의 어두운 눈동자가 나풀거리는 속눈썹 아래 감춰졌다가 나타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퇴폐적인 붉은빛이다. 보고 있노라면 가라앉는 늪처럼.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지?”
“예. 전해져옵니다.”
“얌전히 말 들을 거지?”
5012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의미가 있습니까?”
그녀는 그를 살리고자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 연명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하루하루 매일 매일이 생존을 위한 투쟁인 법이란다. 우리는 계속 그렇게 살아왔잖니.”
“그건 우리가 살고자 하면 언제까지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나는 인간일 때의 기억이 있지. 인간은 필멸하는 존재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딱히 죽을 운명에 미리 절망하며 자살하러 가진 않는단다.”
“그건…….”
“그저 하루 더, 사는 거야.”
0429가 5012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유는 없어. 설명도 필요 없어. 삶이란 그토록 당연한 거니까. 이곳까지 온 이유를 기억하렴. 죽고 싶지 않아서잖니?”
영혼이 이만치나 합일되었어도, 0429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간헐적으로 사고가 흘러 들어와도 여전히 언제나 미지에 속한 자. 그녀의 말대로 하면 닿을 수 있을까.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대로 하나가 된다면…….
그녀가 그에게 입을 맞춘다. 남들보다 짙은 어둠을 가진 그녀의 영혼이 흘러 들어왔다. 섞인다. 이것을 모조리 가진다면 분명, 남은 생애 간에는 영혼의 불균형 따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 정도로 농밀한 어둠이다.
동시에 뒷골을 당기는 찌릿한 쾌감. 피조물 된 자로서 창조주 어버이를 소유하는 반역의 감각. 나의 모든 것은 당신이 빚은 것이요, 그리하여 나는 당신에게 속한 자이나, 당신은 나를 알되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하니, 그것이 늘 간극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스승 어버이 귀속자이던 이를 역으로 소유한다. 어둠이 품 안에서 녹아내린다. 한 줌으로.
“…….”
흘러내리는 옷가지를 붙들고 5012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충만함이 들어찬다. 하나의 존재를 통째로 집어삼킨 포만감일까. 아니면 당신에게 닿았기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아. 아지랑이처럼 속삭이고도 그녀는 자신의 장난감을 하루 더 살려놓기 위해 죽었다. 5012는 그것이 몹시도 기꺼웠다. 저열한 기쁨이 차올랐다. 그걸로 충분했다. 애초에 이 북극행은 그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 제안한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삶에 바라는 것이 없었다.
5012는 낫을 꺼내 든다. 자신의 영혼 일부를 떼어 만든 무기. 사자를 해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죽을 것으로 예정된 육체로부터 영혼을 수확하는 도구. 그것을 제 목에 들이밀었다.
지켜야 할 규칙도 없고 따라야 할 선배도 없었으며 바라던 미련은 전부 채웠다. 이곳에서 그가 할 것은 더 없었다. 그녀가 통탄스러워하리란 사실마저도 즐거웠다.
―!
텐트가 바람에 무너진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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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WD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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